사상계에서 언어의 전환은 이른바 ‘구조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냈다. 간략하게 표현한다면, ‘말’은 관계의 구조를 이루고, 이 구조는 사회의 구조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를 일단 받아들인다면, 다른 언어를 가진 각각의 사회는 각각의 구조를 가진다는 뜻이 된다. 이 구조는 대게는 거미줄이나 바둑판 같은 이미지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솔롱고스는 이 구조가 그 사회의 의미 있는 무언가를 걸러내는 또는 걷어 올리는 것으로 이미지화할 수 있는 단어를 찾다가, ‘채(screen)’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채는 채의 구멍보다 작은 것들은 건져 올리지 못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액체나 기체는 건질 수 없다. 또 저렇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도, 우리는 쉽게 채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하지만 이 이상의 논의는 이 역사수다를 철학수다로 변질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무의식이라는 바다에서 의미라는 물고기를 채와 같은 문자로 건져 올린다고 상상해보자. 채가 다르면 다른 물고기를 건질 것이다. 그래서 오래 전 어느 나라의 똑똑한 어떤 임금이 다음과 같은 서문을 쓰고 새롭게 문자를 만드셨는데, 그것이 잘 알려진 ‘훈민정음’이다.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 째 기사)

정말 그 문자도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서문임에 틀림없다. 이 서문 앞에서 솔롱고스가 정리한 구조주의 이론에 따른다면, 세종 28년 9월 29일에 우리 조상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건져 올릴 새로운 채 하나를 만들어 얻게 된 셈이다.

실록의 같은 기사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예조 판서 정인지(鄭麟趾)의 서문에, 천지(天地) 자연의 소리가 있으면 반드시 천지 자연의 글이 있게 되니, 옛사람이 소리로 인하여 글자를 만들어 만물(萬物)의 정(情)을 통하여서, 삼재(三才)128)의 도리를 기재하여 뒷세상에서 변경할 수 없게 한 까닭이다. 그러나, 사방의 풍토(風土)가 구별되매 성기(聲氣)도 또한 따라 다르게 된다. 대개 외국(外國)의 말은 그 소리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서 그 일용(日用)에 통하게 하니, 이것이 둥근 장부가 네모진 구멍에 들어가 서로 어긋남과 같은데, 어찌 능히 통하여 막힘이 없겠는가. 요는 모두 각기 처지(處地)에 따라 편안하게 해야만 되고, 억지로 같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둥근 장부를 건져 올릴 수 있는 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 그 채의 성능을 살펴볼 차례다. 역시 같은 기사다

계해년 겨울에 우리 전하(殿下)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 소리에 인하여 음(音)은 칠조(七調)129)에 합하여 삼극(三極)130)의 뜻과 이기(二氣)131)의 정묘함이 구비 포괄(包括)되지 않은 것이 없어서, 28자로써 전환(轉換)하여 다함이 없이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자세하면서도 통달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사용하여 구비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결론으로 우리 조상은 1446년 9월 전까지는 둥근 장부를 네모진 구멍으로 건져 올려 기록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기록한 역사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우리는 중국인이 기록한, 아니 한자로 기록한 모든 문장을 의심해봐야 한다.

즉 중국인은 북방 유목민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로 나눈다. 그런데 흉노, 선비, 갈, 예맥이니 하는 명칭은 이들 부족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이다. 예컨대 일반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이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다.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을 그렇게 부를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이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이다.(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프레시안 2005.4.20.)

게다가 중국인은 고약한 성격을 가졌다. 자기가 아닌 외국인을 지칭하는 말들이 욕설이다. 허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훨씬 의심이 커졌다는 거다. ‘흉노’에서 ‘노’를 빼면 ‘흉’이다. 통상 종성으로 쓰는 ‘ㅇ’과 ‘ㄴ’은 서로 잘 바뀐다. 그럼 어떻게 될까? ‘흉’이 ‘훈’이 된다. 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발음인데?! 그렇다. 서양사에 출현하는 그 ‘훈(Hun)’이다. 게르만족을 압박해 그 게르만인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망하게 되는 바로 그 ‘훈’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의심스러운가? 그러면 지난 수다에서 보여드린 지도를 다시 꺼내볼까?

서쪽에 지중해를 품은 최고 전성기의 로마가 보인다.(파란색) 물론 동쪽에 파랗게 칠한 제국이 중국(당시는 한왕조)이다. 로마를 압박할 예정인 게르만족이 보이는가?(오렌지색) 게르만족을 압박할 준비를 마친 ‘훈’(빨강)이 보인다.

동쪽에 한나라를 북쪽에서 압박하고 있는 흉노(빨강)가 보이는가? ‘훈’인 ‘흉노’가 멀어 보이는가? 제 눈엔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저 지역은 스텝지역이다. 초원지대. 말 타는 민족들에겐 더더욱 가까울 거다.

이게 솔롱고스만의 억측일까? 사실 이건 제 아이디어가 아니다. 앞서 인용한 김운회 선생님의 생각이고, 저는 이 학설을 지지한다. 우리는 그 오랫동안 한자라는 잘 맞지 않는 채(screen)로 왜곡된 역사상을 건져 올렸다. 중국인들의 눈으로 만든 렌즈로, 굴곡된 이미지를 보고 있었다.

다행히 이제 우리에게 한자보다 잘 맞는 문자가 있다. 역사도 이 채로 건지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시간이 한자로 기록되었지만, 한글이 만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갈 역사서술에 기대를 걸어본다.

하지만 솔롱고스는 한글사랑주의 역사애호가는 아니다. 오히려 역사가 한자로 걸러졌으니, 한글로 한 번 더 거른다면 더 정확한 역사서술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바다. 하지만 너무 촘촘하면 걸러지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그래도 많은 우수한 역사가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