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2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지만 시골에 와서 신기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촉’이었다.

남이 농사 안 짓는 밭을 무상으로 빌려 낫과 삽으로 아까시나무를 다 뽑아냈다. 아까시나무를 뽑아내면서 깨달았다. 겉에서 보이는 나무 크기만큼 뿌리도 땅 속 깊이 자란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는 나무를 보면 뿌리의 깊이와 굵기와 길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쨌든 아까시나무를 뽑아낸 자리에 콩을 심었다. 콩을 심고 나자 비둘기나 꿩이 달려든다. 새벽마다 밭에 나가 돌멩이를 들고 새를 쫓았는데 미처 새를 막지 못해 ‘촉’을 틔운 채 맨살을 드러낸 콩 씨를 보았다. 그때의 신기함이란...

‘촉’을 제대로 겪어본 건 다음해에 고추를 기를 때였다. 설 쇠고 고추 씨를 사서 물에 담갔다가 촉촉한 수건에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얼마 안 지나 작은 고추 씨 하나 하나가 촉을 틔웠다. 그때의 신기함이란... 또 그 부드러운 ‘촉’을 보면서 ‘촉감’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촉’이 자라 단단한 흙속에 실뿌리를 뻗고, 흙속에 있는 영양을 골고루 빨아들여 그 힘으로 씨를 땅위로 밀어 올린다. 드디어 땅위로 싹이 난다. 씨를 심지 않은 사람들은 그때서야 콩이 자라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씨가 오랫동안 땅속에서 ‘촉’을 틔우고 실뿌리를 뻗고 씨를 땅위로 밀어 올린 건 농부만이 아는 사실이다.

작물이 튼튼하려면 실뿌리가 잘 발달해야 한다. 부드러운 실뿌리가 잘 발달해야 흙속에 있는 모든 영양을 잘 빨아들일 수가 있다. 그렇게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작물은 먹으면 금방 알 수가 있다. 입안에 쫙 퍼지는 싱싱한 느낌에서 농부는 살아 있는 ‘촉’과 실뿌리와 흙을 떠올린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도 작물이 자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아이들은 마치 씨가 ‘촉’을 틔우고 실뿌리를 뻗어 흙속의 모든 영양을 빨아들이듯, 이 세상 만물을 느끼고 받아들인다. 이 단계의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흙속의 영양, 건강한 ‘촉’, 실뿌리가 잘 발달하는 것, 실뿌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마치 실뿌리가 빨아들인 영양을 먹고 자란 작물이 씨를 밀어 땅위로 밀어 올리면서 ‘싹’을 틔우듯, 말로, 글로, 그림으로, 노래로, 사진으로, 몸으로 표현을 한다. 이 단계의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잘 표현하기 위해서는 잘 느껴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표현을 하면 할수록 느낌은 더 살아나고 살아난 느낌은 표현을 풍부하게 한다. 그리하여 줄기는 굵어지고 이파리는 커진다. 땅속에서는 굵어진 뿌리에 실뿌리가 더욱더 발달한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은 마치 작물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좋아하는 것에 집중한다. 농사를 좋아하는 아이는 농사를 짓고, 글을 좋아하는 아이는 글을 읽고 쓴다. 이 단계 아이의 능력은 보통 어른의 능력을 넘어선다. 어른들은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대화를 나누면서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지켜보면 된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어떤 분야에서 일을 하든 섬세한 감각과 풍부한 표현력으로 집중성 있게 일을 한다. 그러면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것 말고 무엇을 더 바라랴!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문제해결 능력을 키워주는 것,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 독학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물론 생명에 대한 섬세한 감수성과 표현력, 생명체에 대한 따뜻한 사랑, 모든 생명체를 ‘모시고 살리는 것’은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