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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관세화 유예라는 빗장이 풀리고 쌀시장의 문이 열렸다. 지금도 이미 쌀 자급률은 90% 이하로 떨어졌고 쌀을 포함한 곡물자급률이 25%도 안되는 현실에서 대책 없는 쌀시장의 개방은 농민의 삶을 더욱 벼랑으로 내몰 것이다. 나아가 우리 겨레를 지탱하고 있는 생명줄을 통째로 내주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지금도 이미 비닐하우스와 인삼밭 등으로 논이 많이 사라져가고 있지만 가을하늘 아래 누렇게 익어가는 황금들판의 모습은 이제 먼 기억 속에만 남아 있을 날이 머지않았다.
이 땅 농부는 논 농사를 가장 바탕이 되는 소중한 농사로 여겨왔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우리 겨레의 생명을 살리고 이어온 힘의 근원도 논 농사였다. 논 농사와 쌀은 단지 우리 겨레를 먹여 살리고 농부의 생활을 가능하게 한 물질적인 힘 그 이상이었다. 우리 삶이고 정서이자 우리 겨레를 공동체로 이어져오게 한 집단 영혼의 상징이었다. 이제 그 위대한 영혼의 상징이 우리 눈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지려 하고 있다.
이십 육 년 전인 88년 3월, 스물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 괴산 삼송리에 무턱대고 내려왔다. 이른 봄부터 동네 형들을 따라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고된 농사일을 배우며 까맣게 타들어가는 얼굴과 팔뚝을 내심 뿌듯해하던 시절이다. 그때 배운 여러 농사일 중에서도 오월 중순부터 보름 정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녔던 손모내기가 가장 뿌듯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농부의 생명력도 손모내기를 통해 숙련된 모잽이(모 심는 일꾼)가 되고 난 다음부터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다.
93년 본격적인 내 농사의 시작도 벼농사였다. 농부라면 당연히 먹을 쌀 정도는 자급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닷 마지기 남짓 되는 논을 구해 유기농업을 한답시고 비료 대신 거름을 넣고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고 벼농사를 지었다. 지금처럼 우렁이를 이용해 풀을 잡는 기술이 없어서 벼보다 풀이 더 많은 논을 만들기 일쑤였고 더군다나 병충해까지 겹치면 수확은 형편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90년대 초부터 우리 지역에 일기 시작한 비닐하우스 열풍을 나도 비켜가지 못했다. 많은 논이 비닐하우스로 변해갔다. 논 농사에 비해 큰 돈이 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돈이 필요했다. 논 농사를 제대로 지어도 작은 규모로는 생계를 꾸릴 엄두도 못 내는데 더군다나 유기농을 한답시고 빈털러리 농사를 짓고 있자니 당장 처자식을 건사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논에 하우스 파이프를 꽂고 비닐을 씌워 토마토와 고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우스에 토마토와 고추를 심고, 또 논에 닭장을 지어 유정란을 하면서 1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부끄럽게도 논을 줄어들게 하는 데 나 역시 일조했다. 그러나 늘 논 농사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작은 논 하나라도 얻어 매년 물을 대고 모를 심어 벼를 길렀다. 논은 늘 내 마음에 기쁨과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좋은 친구였다.
솔뫼농장 일을 하면서 농사로 주 생계를 꾸리지 않고 있는 지금도 논 농사 만큼은 계속 하고 있다. 먹을 쌀을 자급해야 한다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사라져가는 논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크다. 또 논 농사를 통해 내가 얻는 기쁨과 평화의 기운이 참 좋다. 언젠가 다시 온전한 농부로 되돌아 온다면 그때는 온전한 논 농사를 짓고 싶다. 욕심 같아선 뜻있는 젊은이와 함께 논과 벼농사를 지키고 살리는 영농사업단을 만들어 함께 해보고 싶은 망상(?)을 가져보기도 한다.
이제 도시 소비자를 비롯한 국민에게 이야기 하고 싶다. 이대로 가면 우리 겨레의 밥줄은 통째로 외국 자본에 넘겨주고 우리 영혼에 깊게 자리 잡은 황금들녘의 상징은 비닐하우스와 인삼밭과 축사 더 나아가 레저시설과 모텔과 산업단지에 그 위대한 생명을 내어주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제 적극 논과 벼농사를 지키려는 농민과 손을 잡자. 그 농민들이 논농사를 지으면서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으자. 사라져갈 위기에 놓인 논을 함께 지켜내고 뜻있는 농민들이 그 논에서 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돕자. 또 적극적으로 쌀을 먹자. 우리 생명의 원천이자 우리 힘의 근원이며 우리 영혼의 상징인 논과 벼와 쌀을 지켜내는 일에 온 마음과 힘을 한번 모아보자.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기는데 우리의 온힘을 모으면 안될 것도 없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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