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아끼는? 그냥 좋은?’

어떤 형용사가 더 맞을지 모르겠지만 J와 나는 긴 시간을 서로 곁에 있었다. 그녀가 결혼하기 전부터 모임을 통해 알게 되었고 20년도 전에 인도여행을 같이 갔고, 그리고 10년도 넘게 근거리에 살고 있다. 그녀는 나보다 내 딸과 나이 차가 적을 정도지만 우린 친구처럼 지낸다. 그러나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살면서도 얼굴 보는 건 쉽지 않다. 그녀도 나도 바삐 살고 자기만의 삶의 영역이 분명해서 다만 존중하며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 중요한 건 우린 자주 안 봐도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혼자서도 척척 잘 산다. 아들도 남편도 자유롭고 독립적인 그녀 곁에서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 애쓴다. 물론 J의 성에 찰 만큼은 아니다. 그래도 그녀는 나보단 훨씬 그리고 또래 여성보다도 아주 많이 자유롭다. 물론 그 공간은 J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긴 하다. 우린 어쩌다 시간이 맞으면 차도 마시고 얘기도 한다. 그 시간을 우린 귀하게 여길 줄 안다. 올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와 암 투병 중이신 J 아버지, 우린 공감대가 많은 대화를 했다. 우리가 만날 때마다 나눌 화제는 많다. ‘학교 이야기, 아이들과 교사들 이야기, 나이 드는 것과 여성의 삶, 병과 죽음, 부모, 자식에 관한 이야기, 책이야기 등등’ 삶처럼, 이야기도 끝이 없이 변한다.

J는 길을 떠나는 사람이다. 가고 싶은 곳은 거의 다 가본 J는 거침없다. 나는 가고픈 곳이 있어도 많이 잰다. 안전과 비용과 두려움과 불편함과 낯선 음식들까지 염려대상이다. 그래서 나는 머무는 시간이 많고 J는 떠나는 시간이 많다. 방학 때마다 세계 곳곳을 누빈 그녀는 퇴직하게 되면 외국에 가서 살 거라고 했다. 난 또 그녀를 멀리 보내야하는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은 웬만하면 무엇과도 깊은 정을 들이지 않으려 노력한다. 조금은 거리를 유지한 채 언제 돌아서도 마음 아프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이미 그 거리를 넘어와 버린 관계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른 아침 구로 올레길 코스를 걷는데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우린 나무처럼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숲 향기가 코끝으로 진하게 전해졌다. 나뭇잎에 방울방울 맺힌 빗방울들, 아침식사로 바쁜 새들 소리, 싱그런 여름 숲길이 주는 선물을 온몸으로 받았다. 뭐든지 척척인 J가 유난히 모르는 게 있다면 식물 이름이다. ‘원추리, 비비추, 금계국, 맨드라미, 들깨, 토란, 계수나무, 칡꽃, 능소화......,’ J는 내가 이름을 알려줄 때마다 신기해 했다. 능소화는 혼자서지 못해 누군가에게 기대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설명해주었다. 어떤 사람들처럼, 식물 중에서도 다른 누군가가 꼭 있어야만 반듯한 자태를 잡을 수 있는 것도 있다고.

J와 오전을 보내고 남동생이랑 엄마 집엘 갔다. 아버지를 보내고 엄마는 급격히 건강이 악화됐다. 남동생은 수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의 보호자다. ‘남편’과 ‘보호자’란 이름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나는 동생을 볼 때마다 확인한다. 동생은 환자의 보호자로 산다. 낮에는 직장에 가서 일하고 밤과 주말엔 아내를 돌보는데 온 시간을 쓴다. 동생이 일할 땐 아내의 어머니와 언니가 교대로 동생의 아내를 돌본다. 한 사람의 아픈 삶을 세 명이 책임진 지 7년이 넘었다.

밤에도 두 시간 이상을 연속해서 자본적 없다는 동생은, 매주 주말마다 아픈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아픈 엄마를 돌보러 온다. 나는 가능하면 동생이 오는 시간에 맞춰 엄마 집에 가려고 애쓴다. 동생의 상황과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반나절을 엄마 집에서 동생네와 함께 지내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동생은 휠체어에 아내를 앉힐 때마다 낑낑대며 힘들어한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동생에게 ‘오래 돌보려면 근력운동이라도 해야겠다.’고 말한다. 맘 좋은 동생은 그저 웃는다.

오후 내내 음식을 잘 못 드시는 엄마를 위해 이것저것 하느라고 부엌에 서 있었더니 내 몸도 지친다. 엘리베이터를 타며 동생에게 속삭였다.

‘우린 이렇게 곁의 사람들을 돌보지만 나중에 너나 내가 쓰러지면 아무도 없을 거야.’

말을 하면서도 참 쓸쓸하다 생각했는데 그 말을 들은 동생은 바로 정색을 한다.

“난 절대 쓰러지면 안 돼. 절대로.”

에고! 동생의 말이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더 좋아질 가망이 없는 돌봄, 그 돌봄 노동으로 남은 인생의 시간이 꽉 채워질 동생, 동생이 견디는 힘도 능소화가 자신의 굵은 줄기를 둥글게 말아 생명을 고정시키려는 안간힘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 순간 이혼하고 혼자서 몸이 불편한 아이를 키우는 후배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배도 늘 ‘아이보다 하루만이라도 오래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돈을 버는 것도 자신의 운동도 모두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고혈압에 당뇨에 온갖 지병을 가진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돌보고 있는 아이를 위해 절대 쓰러지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는 후배, 세상엔 이렇게 고단한 삶들이 얼마나 많을까? 그들이 날마다 가슴으로 새김질할, 그 강렬한 무장이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