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것은 견딜 수 있는 수명이 다 있나보다. 집도 그렇다. 집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 전구, 인터폰, 도어락, 화재경보기, 가스렌지, 변기, 전자제품 등 어느 것 하나 영원히 쓸 수 있는 것은 없다. 물로 사람도 그렇지만.

10년이 넘은 내아파트는 수명을 넘긴 것들이 하나 둘 생겨나며 자꾸만 뭐가 고장 난다. 그런데 그것들은 아예 생산이 안 되고 절품된 것도 많아 난감할 때가 많다. 워낙 뭘 고치는 데 재주가 없는데다 평생 그런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습성이 지금은 엄청난 불편함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아파트에 뭐가 고장 나면 더럭 겁부터 난다.

‘혼자 해결할 수 있을까? 못 고치면 어떡하지?’

처음엔 아는 사람이나 동생을 부르기도 하고 관리소장님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서서히 스스로 처리하거나 아니면 불편을 감내하며 지내려고 노력한다. (지내보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불편하기도 했다.)

오늘은 비데다. 며칠 전부터 수압이 약하더니 오늘 아침엔 아예 작동이 안 된다. 인턴넷을 뒤져보니 필터나 부품교환하면 된단다. 비데에 붙어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제품은 이제 생산하지 않는단다. 이미 오래 썼을 테니 새로 구입하란 조언까지 한다. 다시 컴을 켜서 인근의 비데매장을 찾고 전화로 구입을 했다. 내일이나 가능하다던 설치기사가 바로 오후에 올수 있다며 집으로 왔다.

기사님의 목소리는 어려 보였다. 9월 들어 조금은 시원해진 날이지만 무거운 짐을 들고 온 그는 마스크도 벗지 못하니 땀을 흘렸다. 남의 집에서 가장 은밀한 곳, 혹은 가장 더러운 곳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 민망함과 불편함이 그에겐 익숙해 보였다. 그는 한숨도 쉬지 않고 빠르고 친절하게 작업을 마친 후 필터 교환하는 방법까지 친절히 알려준다. 작업이 끝난 후 손을 씻을 때도 조심스러워했다. 나도 비누를 사용해도 되니 편히 씻으라고 했다. 그는 감사 인사를 하며 손을 씻었다. 사소한 몸짓도 그가 얼마나 조심하며 작업을 하는지 느껴졌다. 게다가 당연한 것도 감사의 내용이 돼버리다니.

결재를 한 후 시원한 물잔을 권했다. 그는 물을 마실 때도 짐을 내려놓지 않았다. 무거울 텐데 급해 보이기도 했고, 조금이라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숙달된 태도가 느껴져 하려던 말을 참았다. 대신 누가 사람의 관계를 이토록 기계적으로 만들어버렸나 생각했다.

그가 편히 물을 마시도록 다 마실 동안 조금 떨어져 있었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에게 물었다. “점심은 드시고 일하시나요?” 그는 웃으며 답했다. “아직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4시가 다 되고 있었다. 나는 아들이 생각나 안쓰러웠다.(아들은 요즘 스시 집에서 일하느라 밤12시 이전에 저녁을 먹질 못한다. )

‘그런 줄 알았으면 그가 오기 전에 뭐라도 준비해 놓을 걸, 물 말고 우유라도 줄 걸.’

허기진 배로 다음 고객(?)을 향해 친절과 빠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을 기사님을 한참을 생각했다. 그의 뒷모습은 ‘자본을 통해 그토록 서비스를 받고자 하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체적 목록이자 지금을 사는 우리 아들들의 자화상’이다. 현관문을 들어서서 다시 나갈 때까지 단 한 번도 집주인의 눈을 마주보지 않고 시선을 아래로 두며, 혹시라도 혼자 있는 여성이 느낄 수많은 의혹들을 차단하며 일하는 수많은 기사님들, 나는 안전한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생각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 모두가 밥은 제때 먹고 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2020.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