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행복이란 디테일한 일상에 있다. 흰 구름 둥둥 떠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여유에도 있고, 살랑이는 바람을 느끼며 가을이 오는 걸 알아채는 작은 순간에도 행복은 있다. 눈 뜨면 전하는 ‘굿모닝!’ 문자에도 있고, 좋은 사람과 마주한 식탁에도 있고, 만나면 즐거운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에도 있다.

전쟁은 이 모든 걸 한꺼번에 가져가고 바꿀 힘이 있다. 또 일상의 모든 디테일을 무너뜨릴 거대한 파도와 그 파도 속에서 ‘한시적 가치관의 전도’를 용인한다. 그래서 전쟁은 매일 집에 가고 밥을 먹고 식구들 얼굴을 보던 그 일상이 꿈처럼 사라져가고 생사조차 알기 힘들거나 처참한 이별을 목도하거나 평생 안고 가야할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대구 희움(희망을 모아 꽃 피움) ‘위안부’역사관에서 만난 ‘김순악’은 살아 있는 전쟁과 위안부 생애사를 그대로 지닌 분이었다. 당신은 ‘내 살았는 기 죄가 많은 기 아이라’며 모든 불행의 원인을 당신 탓으로 돌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동생들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나섰던 길이 위안부가 돼버린 일도,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도 집에 갈 차비도 없어서 또 고생한 날들, 당신 몸에서 난 자식들이 원망과 손가락질로 부정하던 당신 삶도, 모두 당신이 부족한 탓이라 여겼다.

그런 그녀가 당신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손 잡아준 사람들을 만나며 내 놓은 삶이야기는 뒤틀린 역사만큼이나 아프다. 전시관에 놓인 물건들 중 한글 공부 하시던 공책, 미군들 상대한 물건들, 담배, 술잔, ‘대상자결정통지서(일제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생활안정지원법)’ 등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흔히 벽에 거는 액자와 다른 이 통지서는 위안부가 전시피해자였음을 국가가 인정해주는 것은 당신의 일그러진 삶이 개인이 아니라, 전쟁이 망가뜨렸음을 공인하는 것임을 그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6.25때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수백 명의 희생자가 있는 노근리에서 본 생존자 증언 중 당시 13살이었던 여성분의 이야기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쌍굴다리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처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무언가가 쑥 빠져나오는 걸 느꼈는데 그게 ‘눈 알’이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엄마도 총에 맞아 움직일 힘이 없어 ‘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고, 그렇게 그녀는 실명을 하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쪽 눈이 없는 삶은 평생 그녀를 깊은 수렁에 빠뜨렸을 것이다. 결혼이나 그 후의 시간들이 얼마나 그녀를 비통하게 했을지, 차별과 편견이 많은 이 땅에서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 사는 일은 짐작을 넘어 눈에 보인다.

전쟁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다. 그 파괴 중 가장 최악이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파괴다. 그리고 그 피해자의 최전선에 여성과 아이들이 있다. 그리고 피해의 결과와 상처는 개인 몫으로 남아 다음 세대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김순악 할머니와 노근리 피해자 사례가 그렇다. 나는 이 분들 이야기를 구체로 만나며 가슴이 많이 아렸다. 시대를 바꿔 태어났다면 내 이야기가 됐을 수도 있는 이야기 아닌가?

한일관계가 험악해져가는 걸 보며 위안부문제 해결은 자꾸만 멀어져가는 듯 느껴진다. 위안부가 아예 없었다고까지 하는 일본의 태도와 노근리 사건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도 닮은 데가 많다. 진실 뒤에 숨어야 하는 갖가지 계산이 따르는 언어들은 비겁하고 과장이 심하다. 거짓을 위한 거짓이 동원되고 역사는 날조되기도 한다.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나와 우리’에서 진행한 ‘2019 나와 우리, 평화 워크숍’에서 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 현재형인, 전쟁으로 인한 여성들의 아픔을 만나고 왔다. 통곡이 사무친 사람들의 이야기와 장소와 흔적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평화를 배웠다.(2019.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