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1일 증평비지니스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괴산의 문화를 안내했다. 숲길이나 안내하던 내가 오늘은 같잖게 문화해설사로 변신했다. 제월리 홍명희 시비, 고산정, 제월대에서 시작해서 충무공 김시민 사당, 취묵당(억만재)에 들렀다가 홍명희 생가, 홍범식 산소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에게 홍명희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 평생 홍명희만 연구한 강영주의 ‘홍명희 평전’과 한겨레신문에 실린 곽병찬 대기자의 ‘향원익청’을 다시 읽었다.

오전 9시 30분이 되자 학생들이 버스에 내렸다. 학생들을 시비 앞에 빙 둘러서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은 홍명희 이름 석 자를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다. 일제 강점기 때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좌와 우를 아우른 항일단체였던 신간회 운동을 벌였다. 신간회란 이름은 신한회란 이름에서 ‘한(韓)’자를 일제가 못 쓰게 해서 할 수 없이 오래된 나무에서 새로 나는 가지란 뜻을 가진 ‘간(幹)’자를 써서 지은 이름이다. 해방 뒤에는 남북 분단을 막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만 회담을 위해 북에 갔다가 북에 남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완전히 지워진 사람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이광수, 최남선은 알아도 홍명희는 모른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요새로 치면 박경리의 토지나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 같은 작품과 비슷한 작품이라고 말해주었다. 일본 강점기 일본 책의 영향을 받아 일본말투로 쓴 다른 문학작품과 달리 순 조선 정조(정서, 분위기, 맛, 멋)로 쓴 작품으로 글말(문어체)이 아닌 입말(구어체)로 썼기 때문에 우리 말맛이 잘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문화를 잘 살린 작품이라는 점도 말해주었다.

시비에 새겨진 글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고 했다. 시비에 새겨진 글에는 없지만 그 앞 부분까지 포함한 전문은 이렇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양취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윗글에서 ‘지나’는 중국을 가리키고 ‘양취’는 서양 냄새를 말한다. 이 글을 요즘 쓰는 말로 고치면 이렇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시작할 때 한 가지 결심을 했지요.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중국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정서가 우리와 떨어진 게 많았고, 또 요새는 서양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서양 냄새가 나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서로나 모두 모두 남한테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걸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조선 정서에 한결같은 작품 이것이 내 목표였습니다.”

시비에서 조금 걸어서 고산정에 올랐다. 고산정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고산정은 고산구곡의 일곡이다. 구곡문화는 주자가 무이산에서 공부할 때 무이산의 경치 좋은 곳을 아홉 군데 정해서 이름을 저마다 정한 것을 배워서 우리나라 경치 좋은 곳을 구곡으로 나누는 것이다. 괴산에 있는 화양구곡, 선유구곡, 갈은구곡, 고산구곡 들이 그렇다.

고산정은 1596년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세운 정자이다. 본디 이름은 만송정이었는데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해 시골로 와서 조용히 살면서 고산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산정 현판은 완산 이원이 썼다. 유근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했는데 제월대의 경치를 자랑하자 그림을 보여달라고 해서 그림을 그려오게 해서 보여주었더니 ‘호산승집’이라는 글자를 써주어서 그 액자가 걸려 있다. 또 명나라 사신 능화(괴산군지에는 능화, 고산정 앞 해설문에는 웅화로 되어 있다.)가 1609년에 지은 고산정사기와 그 화답시가 걸려 있다.

고산정에서 조금 옆으로 걸어가면 바위에 제월대(霽月臺)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월대의 제월은 비가 개인 날의 밝은 달을 뜻하는 말이다. 홍명희가 3.1운동 뒤 감옥에서 나와 제월대에 올라 달을 보면서 일제가 물러간 날의 조국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제월리를 떠나 충민사(충무공 김시민 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로 갔다. 충민사에 도착하자 문화해설을 하시는 분이 나와 계신다. 그분이 학생들에게 해설해 주셨다. 나는 이미 학생들에게 할 이야기를 따로 정리해 두었는데 내용은 이렇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이다.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 싸움에서 병력 3800여 명으로 왜군 2만여 명과 싸워 승리했으나 순절했다. 조상의 산소가 능촌리에 있었고 충민사는 충주에 있었으나 충주댐 건설로 이곳으로 왔다.

충민사 옆 계단으로 올라 조금 가면 취묵당(억만재)이 보인다. 현판은 안 보인다. 취묵당(억만재)은 조선 중기 시인 백곡 김득신이 1662년에 세웠다. ‘백곡’은 잣나무 골짜기란 뜻이다. 김득신은 김시민의 손자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의 ‘백이전’을 1억1만3천 번을 읽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십만 번을 억이라고 했다니 11만3천 번을 읽은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는 향원익청이란 글에서 뭐든지 빨리 배웠던 홍명희와 느리게 배웠던 김득신을 견주면서 글을 썼다.

김득신이 취묵당으로 지었으나 후손 김교헌이 억만재로 바꿨다. 정자에는 취묵당중건기, 취묵당팔영, 취묵당서 독수기 들이 걸려 있다. 또 남쪽 네 기둥에는 김득신의 대표시 ‘용호’가 걸려 있다.

[용호]

오래된 나무는 찬 구름 속에 잠기고/古木寒雲裏

가을 산엔 소낙비 들이치네/秋山白雨邊

저문 강에 풍랑이 일자/暮江風浪起

어부는 재빨리 뱃머리를 돌리네/魚子急回船

억만재에서 홍명희 생가로 알려진 제월리 집과 선산을 찾아갔다. 홍명희는 1888년 인산리에서 태어났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에 결혼했다. 1905년에 일본 유학을 갔다가 1910년에 돌아왔다. 그해 나라를 일본에 뺏기자 아버지 홍범식은 자결했다. 3년상을 치루고 중국 상해와 동남아시아를 떠돌다가 1918년에 귀국, 1919년 만세운동을 괴산에서 앞장서 감옥살이를 한다. 그때 인산리 집을 팔고 제월리 산소 묘막이 있던 집으로 이사를 하는데 그곳을 찾았다. 생가로 알려져 있지만 생가는 아니고 잠시 살던 곳이다. 단 이곳에는 선산이 있어 홍명희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장된 산소가 있다.

이 집에서는 홍명희 일가가 월북한 뒤 계모와 홍명희의 이복동생 성희의 본처가 살고 있다가 육이오 때 살해됐다.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는 곳이다.

학생들과 함께 집과 산소를 둘러보고 홍범식 선생 산소 앞에서는 묵념도 드렸다. 산소에 오르는 길에 가시나무가 많아 한 학생이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났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를 뵈러 가는 길이 아직도 우리는 이렇게 험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