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에 시작한 전환기교육 숲길 걷기 괴정을 마무리하면서 달래강 물빛길을 걷기로 했다. 백두대간인 속리산 천황봉에서 시작한 달래강이 괴산읍에 이르면 괴강유원지가 펼쳐지고 그 주변에 조선시대부터 유명한 정자가 늘어서 있다. 조선 중기 박지겸이 세운 애한정, 충청감사 유근이 제월대 절벽 위에 세운 고산정, 김득신이 책을 억만 번 읽었다는 억만재(취묵당)를 찾아서 걸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마침 제월대 아래에 일제강점기 조선 백성들에게 희망을 준 대하소설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 문학비를 거쳐서, 그의 아버지 홍범식 의사 묘소까지 참배하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다.

2021년 가을에 괴산군에서 이 주변을 달래강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다리를 하나 놓아주니 둘레길이 완성되었다. 한나절 걷고 매운탕집이나 괴강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으니 학생들과 학기말에 야외수업을 하기에 좋은 곳을 발견한 것이다.

먼저 출발지점을 억만재로 정하고 택시를 불러서 이탄다리에서 능촌리 방향으로 들어가서 억만재 어귀에 내렸다. 여기서 달래강을 굽어보며 멀리 억만재를 찾고, 그 너머에 있는 충민사 건너는 다리를 건너서 걸어보자고 제안하니 학생들이 너무 멀다고 싫다 한다. 바로 방향을 돌려서 제월대로 가기로 하고 바로 앞에 버티고 선 높은 굴뚝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서 무엇을 태우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라고 물었더니 잘 모른다는 표정들이다. 우리가 버리는 쓰레기를 태우거나 묻는 곳이라고, 증평군의 쓰레기까지 받아서 태우고 묻는다고 말해주니 놀라는 표정이다. “강 건너편 (성불)산 아래 굴뚝은 무엇인가요?” 묻는 학생이 있다. “그곳은 타일을 굽고 inus 변기를 만드는 공장이다.” 답을 해준다. 괴산에 도자기를 굽는 곳이 조선시대부터 많았는데 지금은 타일과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 많다고 말해준다. 도자기 만들기에 좋은 흙이 많고 서울에서 가깝기 때문에 그렇다고 더 자세히 말해주고 싶지만 그 내용만 가지고 한 시간 수업을 해야할 것 같아서 자제한다.

제월대에 도착해 홍명희 문학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홍명희 선생이 3.1만세운동을 괴산에서 주도하고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신간회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자 아이들은 생소한 표정이다. <임꺽정> 소설 10권을 읽어본 학생은 없었지만 뮤지컬로 본 내용은 기억하고 있었다. 홍명희 문학비에 <임꺽정> 작품이 “사건, 인물, 묘사에 있어서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니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이나 생각을 알기 위해 반드시 읽어보자고 강조하고 그의 아버지 홍범식 의사의 묘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제월대에서 제월1리 마을회관까지는 괴산군에서 강변 절벽 위로 걷는 길을 만들어 주어서 안전하고 멋진 걷기 여행을 즐길 수 있다. 홍명희 선생이 3.1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1년 감옥생활을 마친 뒤에 낚시를 하셨다는 제월대 아래 여울에는 물오리떼가 한가로이 노닌다. 제월1리 마을회관을 지나서 골목길로 들어서니 홍범식 의사 묘소 어귀에 조선시대 한옥이 보인다. 홍명희 선생 생가라는 표지를 세워서 역사를 알리고 있는데 앞마당에 있는 200년 넘는 수령의 회양목이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풍산홍씨의 문중 묘소인데, 서울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홍명희 선생의 증조부 홍우길의 묘가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말기 혼란기에 서울을 피해 가족을 이끌고 제월리 일대에 논밭과 선산을 마련하고 이주한 사람인 고조부의 묘소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 홍명희 선생이 1948년에 북한으로 가족을 모두 이끌고 갔지만 새어머니와 며느리(홍성희의 부인) 한 분이 선산을 돌보기 위해 남았다고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의 명령으로 좌익분자와 가족으로 구성된 보도연맹 20만 명을 헌병들이 학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두 분이 증평군 옥녀봉(북이초등학교 뒷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가족에게 책임을 묻는 연좌제가 1980년대까지 남아 있었고 그런 억울한 죽음을 내놓고 추모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는 설명에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이다. 지금은 괴산군 사리면에 추모비가 세워져서 군수까지 참석하는 추모제가 11월에 열렸으니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기억하자고 했다. 어머니와 며느리 두 분의 묘소가 제월리 언덕에 있으니 나중에 한 번 찾아가 보자고 얘기했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홍명희 생가 마루에서 한숨 돌리고 간식을 먹은 후에 다시 출발했다.

아이들은 홍범식 의사 묘소에 올라가는 길에 옷자락을 여미고 가는데 험한 길에 늘어선 찔레덩굴을 피하느라 그렇다. 마침내 묘소 앞에 늘어서서 잠시 묵념을 한다. 일제의 침략에 자결로 항거한 홍범식 의사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는 말에 숙연해진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호남 의병대 토벌에 나서자 당시 태인현감으로 있으면서 의병을 숨겨주는 일을 했고, 금산 군수로 이직해서는 황무지를 개간해 백성들이 먹고살 길을 만들어 주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1910년 당시 충남 금산에서 괴산까지 3백리 길을 상여를 따라 걸어온 백성들이 많았고 그분들이 돌아가서 <홍범식 순절비>를 세웠다고 전했다. 2008년에 금산공원을 홍범식 공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홍범식 순절비>도 그곳으로 이전하면서 크게 기념하고 있는데 괴산에서는 홍범식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깝다.

홍명희 선생이 북한에 가서 194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수상 김일성에 뒤이어 부수상에 취임했다고 독립운동가로서 공적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948년 4월 홍명희 선생이 평양을 방문해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한의 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에 힘을 모은 것은 정당한 일인데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을 주장한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독재자 들은 교과서에도 다루지 못하게 했다. 요즘 학생들이 평화통일보다 김정은 비난에 몰두하는 인터넷 뉴스에 현혹되는 세태를 걱정하면서 홍명희 선생의 고민을 나눠보자고 제안했다. 1948년 남쪽으로 다시 돌아온 김구 선생은 암살을 당했는데, 홍명희 선생이 남쪽에 있었다면 암살을 피할 수 있었을까 질문하니 학생들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답한다. 홍명희 선생은 일제강점기에도 좌우합작통일전선인 신간회를 이끌었듯이 북한에서 부수상을 하면서도 파벌을 만들기보다 애국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한 분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통일이 되면 홍명희 선생의 고향, 괴산을 찾아서 북한 주민들도 많이 방문할 것이고 우리가 그 분들을 반갑게 맞이하자고 다짐하면서 묘소를 떠났다. 못난 조상들의 전철을 따라가지 말고 지혜롭게 평화통일의 길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숲길걷기에 역사의 현장을 포함시키다보니 무거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한참을 걸어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애한정愛閑亭>에 이르렀을 때는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곳”이라고 하니 느긋하게 마루에 앉아서 휴식을 취해 본다. 먼저 지어진 작은 애한정과 위쪽의 큰 애한정 사이에 <동몽선습비>가 있는데 일부러 소개하지 않고 지나쳤다. 애한정을 세운 박지겸의 할아버지 박세무가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용 교과서 <동몽선습>을 지었고 고조선의 역사를 강조하는 자주성과 기개가 엿보인다는 내용을 새겨 놓았다. 앞을 지나는 자동차 전용도로만 아니라면 그야말로 한가롭게 공부하기 좋은 곳이다.

아이들에게 한 시간 뒤에 학교로 돌아가는 차가 온다고 말해주자 무엇을 할까 수군대기 시작했다. 옛 서당인 애한정은 넓은 흙마당을 가지고 있었고 돌로 쌓은 담장과 대청, 부엌이 있는 정겨운 건물이다. 핸드폰만 보고 있기에는 무료하고 아까웠던지 오징어게임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보다 안전한 얼음땡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아서 5분 제한시간을 정하고 얼음땡을 했다.

평소에 뛰지 않던 아이들이 흙마당에서 술래를 정하고 뛰어다니기 시작한다. 건강한 웃음소리가 넘치고 백여 년 전에 아이들이 똑같이 했을 놀이가 되살아났다. 얼음땡을 두 번 더 하고 나서야 지친 듯 조용해진다. 한겨울이지만 마침 따스한 햇볕이 가득한 옛 서당의 마당에서 실컷 뛰놀고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표정이 환하다.